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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s

망고라는 과일에 대하여

by 계발자 망고 2021. 8. 6.

 

나는 원래 망고를 싫어했다.
그도 그럴것이 살면서 '망고'라는 것을 망고맛 사탕이나 망고맛 주스로만 접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 걸쭉한 망고 주스의 텁텁함은 누가 먹다 뱉은 것을 마시는 것처럼 불쾌했다.
마트에서 망고가 비싼 가격에 팔리는 걸 보면 맛도 없는 과일이 물건너와 기세가 등등하구나, 하곤 했다.

한 23살쯤에 회사일에 치이고 혼자서 나자신을 몰아붙이면서 바쁘게 살때가 있었다.
타고난 예민함 덕분에 스스로 재촉하는 버릇이 있었기에 언제나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러다 운좋게 필리핀 여행을 갈 기회가 생겨 다이빙 샵에서 며칠 묵다 온 적이 있다.
물 속에서는 온몸에 힘을 빼도 부유할 수 있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번 다이빙을 하고 나오면 온 힘을 다해 물놀이를 한 어린아이처럼 지쳐서 푹 퍼지게 됐다.

젖은머리로 그늘 아래에서 흐리멍텅하게 쉬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잘개 쪼갠 망고를 권했다.
망고는 가운데에 얇고 넙데데한 씨앗을 가지고 있는데, 그 씨앗의 양 옆을 잘라내서 칼집을 낸 다음 껍질 방향으로 뒤집어 내면 먹기 좋은 모양새가 된다.
깍둑썰기된 망고가 특유의 젤리같은 광택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 망고네.... 저 망고 싫어해요."
그 사람은 코웃음을 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노란 덩어리를 내 손에 강제로 쥐어주었다.
그게 내 인생 첫 망고였고 그 사람은 내인생의 '망익점'이 되었다.

정말 생명력이 넘치는 맛이었다.
새콤 달콤 하면서도 끝 맛에는 호박같은 특유의 풋내가 났고 과육은 단단하면서도 매끄러워 먹는 재미가 있었다.
나는 두 눈이 저절로 휘둥그레졌다.
망고는 씨익, 하고 날 비웃는 것 같았다.

그 이후 여행 동안에 하루 10개 이상의 생망고를 먹어치웠고 나는 망고 신봉자가 되었다.
23년간 나는 망고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함부로 망고를 싫어했던 것이다.

필리핀에서 신선한 생망고를 먹을 때마다 저절로 가족들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생각이 났다.
사는 게 바빠 한번도 해외여행을 가본 적 없는 가족들이 떠올랐고 같이 이렇게 맛있는 망고를 먹으면서 기뻐하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건망고였다.
물론 생망고의 맛에는 비할바가 못되지만, 생망고는 세관에서 통과가 안되기도 할 뿐더러 건망고는 필리핀의 유명한 기념품이 아니던가!
여행을 끝내고 큰 마트에 들러 건과일 코너를 찾았다.
열대 과일이 유명한 나라답게 말린 과일만으로도 큰 매대 한줄을 다 채워 전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한 청년이 건망고 박스 위에 앉아 노래를 부르며 빈 매대에 물건을 채우고 있었다.
"흥얼흥얼~ 흥얼흥얼~"
유니폼을 보아하니 마트 직원인 것 같다.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니... 일하고 있는 거 맞아...?'
일을 하고 있다기엔 꽤 프리한 자세에 나무늘보같은 속도였다.

그는 한국인처럼 보이는 나를 발견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냈다.
"안녀하쎄요!"

내 또래쯤 되었을까?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아치며 마주한 그 남자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만사 걱정없이 즐거워보였다.

순간 거꾸로 아득바득 쫓기듯 살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아무도 다그치지 않는데도 자신을 학대하고 헐떡이며 살고 있는 내 마음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느긋하게라도 별일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구나.'

그 청년은 계속 노래를 부르며 망고를 아주 느리게 걸어댔고
나는 괜시리 혼자 얼굴을 붉히며 건망고를 필요 이상으로 잔뜩 담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망고는 나에게 여유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고
잠시나마 편안하고 걱정없이 살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과일이 되었다.
내가 싫어했던 망고가 내 인생을 바꿔놓은 것이다.

그 이후로도 마음이 혼자 바빠질 때에는 망고를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스스로 다독이며 숨을 고른다.
망고가 해준 말을 잊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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